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지금은 새벽 세 시였다. 만화가인 연수한테야 하루 중 가장 또랑또랑할 시간이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고 있어야 할 시간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미친 초인종은 끈질기게 울려대고 있는 것이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이제 막 사흘 동안의 지옥 같은 마감을 끝내고 허기진 배에 컵라면의 따뜻한 국물을 밀어 넣고 있던 연수로서는 이 심야의 방문객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야?’ 연수는 끈질기게 초인종을 눌러대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을 방향, 아파트 현관을 노려보며 추리에 들어갔다.
1. 원고 독촉을 위해 달려온 잡지사 담당 오 기자일까?
아니다. 원고는 이미 택배로 넘긴 상태다. 마감이 끝난 마당에 기자도 사람인 이상 지금쯤 자고 있을 것이다. 원고 독촉을 할 리가 없지.
2. 그럼 조잡한 사은품을 내밀면서 신문 구독을 강요하는 보급소 직원일까?
그것도 아닐 것 같다. 아무리 부지런하다고 이 시간에 신문 보라고 조르면 나 같아도 그런 신문은 잠 깬 게 약 올라서 더 안 본다.
3. 그것도 아니면 가난한 만화가를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빈집털이 도둑일까?
……음, 글쎄.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어쨌든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아파트 주민들이 죄다 밤잠을 깰 것이고 사흘쯤 뒤에는 이 아파트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연수는 보기 1, 2, 3 중에서 3일 확률이 그 중 높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녀는 오른손에 만약을 대비해서 빈 맥주병을 들고 현관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잔뜩 경계의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예요? 이 시간에!” “어어, 있었구나! 연수야! 나야, 진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연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맥주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진우? 명진우?’ 그 목소리에 연수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과연 열려진 문 사이로 그녀가 알고 있는 그 남자, 명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8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 좋은 선량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띠고서. 여전히 핸섬한 얼굴 그대로. 공포 영화나 귀신의 집 따위에는 조금도 떨지 않던 연수였지만 새벽 세 시에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 앞에 나타난 진우를 대하는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비록 그가 두 달 뒤면 유부남이,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말이다. “어, 어떻게?” “응, 좀 늦긴 했지? 혹시 바쁜 거 아니야?” 연수는 진우의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에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냐, 아냐. 지금 막 마감 넘기고 쉬는 중이었어. 아, 그래, 어서 들어와!” 연수는 들고 있던 맥주병을 등 뒤로 감추면서 진우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진우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는데 연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수의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진우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우는 자기 옆에 서 있는 누군가를 잡아끌더니 연수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내 동생이야. 너도 옛날에 한 번 본 적 있지?” 그 녀석은 진우만큼이나 키가 컸다. 얼굴도 그의 형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형보다 더 잘생겨서 오히려 현실성이 없는 편이었다. 만화 주인공 같은 얼굴이라고나 할까. 단정한 진우와는 달리 어깨까지 기른 머리를 금갈색으로 물들이고, 귀에는 구멍을 여러 개 뚫은데다가 뚫린 만큼 귀걸이도 했다. 목에는 여러 줄의 목걸이와 수첩 같은 것이 걸려 있었고 팔에는 팔찌, 손가락에는 반지, 입고 있는 청바지는 처참하게 찢어진 요란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연수는 한눈에 그 녀석이 날라리임을 알아보았다. 방금 마감을 끝낸 터라 그녀의 방 안은 원고지와 스크린 톤과 자료들로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이 없어 보였다. 여자의 방이라기보다 돼지우리에 흡사한 그 몰골에 연수는 당혹감을 느끼면서 서둘러서 그 모든 잡동사니를 방 한구석에 몰아넣었다. “앉아, 앉아! 마감이 지금 막 끝나서. 방이 좀 지저분하지?” 진우는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동생은 상당히 삐딱한 얼굴로 목에 걸고 있던 수첩에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연수에게 내미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모르고 여자는 진우의 동생인 그 날라리가 넘긴 수첩에 씌어진 글자를 읽었다. 그것은 큼직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 이게 여자 방이야? 돼지우리지! 당신 여자 맞아?
그 순간 그 돼지우리 주인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수첩의 글을 본 진우 역시 당황해서 동생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말았다. “야! 인마! 너, 형 친구한테!” 연수 역시 그 녀석의 머리통을 갈겨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억지로 눌러 참고서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둘이서 나란히?” 진우는 자기 여자친구의 질문에 무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에 연수의 머릿속에서는 위험을 알릴 때 본능적으로 머리 속에서 들리곤 하는 사이렌이 울렸다. 그가 이 표정일 때 그녀에겐 늘 안 좋은 일이 생겼었던 것이다. 반 년 전에 그가 연수의 친구 희원과 약혼하게 되었음을 알려 왔었던 때도 이 비슷한 표정이었던 걸 연수는 기억한다. 그 이후로 연수는 진우의 저 표정이 무서워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런 얼굴을 하는 걸까? 진우가 자신의 단짝 친구 희원이와 약혼한다는 사실을 말해온 뒤로는 연수에게는 더 이상 무서울 것도 가슴 아플 것도 없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을 듣자니, 듣고서 놀랄 말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저어, 너한테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알지만 잠깐 동안만 이 녀석 좀 데리고 있어 줄래? 집에 사정이 있어서.” 진우의 부탁을 그녀가 알아듣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데리고…… 있으라구?” 그게 무슨 소리야? 진우의 집, 그러니까 저 날라리의 집이기도 한 명씨 가문은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200평도 넘는 고래등 같은 그 집을 어쩌고 이런 빈티 나는 아파트에 그런 집 도련님을 맡겨? 왜? 연수의 눈동자에 비친 소리 없는 질문에 진우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거처를 따로 구할 때까지만. 사내 녀석을 너한테 맡기는 건 좀 그렇지만 너 말고는 마땅히 맡길 데가 없어서 말이야.” 그 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 녀석이 다시 수첩에 무언가를 써서 제 형에게 넘겼다.
- 난 싫어! 이런 돼지우리에 어떻게 있으란 말이야? 차라리 호텔로 갈래.
수첩을 같이 본 연수는 자기 집이 돼지우리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화를 내기보다 그 녀석이 다른 곳으로 꺼진다는 사실이 더 반가웠다. ‘그래, 차라리 호텔로 꺼져 주렴! 나도 그 편이 훠얼씬 좋단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진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웃기지 마! 그랬다간 네가 어디로 튈지 어떻게 알아? 별장이나 다른 친구 집은 어머니가 아시니까 곤란하단 말야! 다른 소리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어머니’라는 협박이 그 녀석에게 먹혀들었는지 녀석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연수 역시 진우의 어머니, 그 용의 이빨과 호랑이의 발톱을 가진 무서운 아줌마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머리 없게 딱 잘라서 맡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저기,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다 큰 남자애를 이 좁은 데 두기도 좀 그런데 말이야.” 연수의 질문에 진우는 그녀가 승낙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반가운 표정이 되었고 그의 동생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녀석은 다시 자신의 수첩에 무언가를 써서 연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본 연수와 진우는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다가 하얗게 질려 버렸다. 큼직하게 씌어진 그 글씨를 읽자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난, 아줌마는 안 건드려!
‘아, 아줌마?’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연수의 머리 속에는 천둥 번개가 쳤다. 만약 옆에 그녀가 사랑하는 진우가, 그리고 저 망나니의 형인 진우가 없었다면 아마 연수는 그 녀석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요새 동네 꼬마들이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도 신경 쓰이는 판인데. 저것이 감히 연약한 누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진우가 그녀를 대신해서 녀석의 뒤통수를 갈겨 주었다. “너, 자꾸 버릇없이 그럴 거야? 너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누님한테! 알았지? 내가 데리러 올 때까지 깍듯하게 모셔!” 연수가 듣기에 진우의 그 말은 구구절절 지당한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 괘씸한 녀석은 형의 말에 승복할 수 없다는 듯이 연수의 아래위를 손가락질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노골적인 경멸의 표시를 보고 나서야 연수는 그 순간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자각하고 말았다. 그녀의 지금 의상은 전쟁 같은 마감을 치렀을 때의 모습 그대로여서 솔직히 여자는커녕 인간의 형상도 아니었다. 집 안이기 때문에 연수는 편한 추리닝 차림이었다. 7년 정도 묵은 추리닝. 왼쪽 가슴에는 다니던 대학의 마크가 찍혀 있는 것이었고 그나마 그 추리닝에는 먹물과 스크린 톤 조각과 지우개 떼가 엉망으로 붙어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밥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목욕은커녕 세수할 시간도 없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자니 지금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고무줄로 묶여져서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혹시 눈곱은 끼지 않았을까? 연수는 지금 이 순간 하늘로 꺼지거나 땅 끝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옆방 거울 앞으로라도 달려가서 눈에 눈곱이 끼었는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저 망나니 꼬마의 ‘아줌마’ 소리를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이 참 서글프게 느껴졌다. 명씨네 두 형제는 갑자기 침울해진 연수를 어색한 분위기로 지켜보았다. 늘 밝고 명랑했던 연수가 그녀답지 않게 ‘아줌마’ 소리에 너무나 침통해 있는지라 진우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자기 동생의 머리에 힘주어 알밤을 먹이고는 서둘러서 자신의 친구를 위로했다. “이 녀석 헛소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연수야! 기억 안 나? 왜 7년 전쯤에 너 우리 집에 왔을 때도 이 녀석이 너보고 아줌마라고 했었잖아? 이 녀석, 자기보다 한 살이라도 더 많으면 무조건 아줌마라고 한다니까.” ‘7년 전?’ 연수는 자신의 기억 속 인명사전을 한 장, 한 장 거슬러 넘겨보았다. 내가 이 망나니를 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 연수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녀석은 피식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158cm인 그녀에 비해 족히 30cm는 더 길어 보이는 녀석이 코앞에 다가서자 연수는 순간적으로 기가 질렸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기분 나쁜 비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거의 포갤 듯이 접근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또 무슨 끔찍한 소리가 적혀 있으려나. 수첩을 받아든 연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 그 안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잘난 척하더니 결국 내가 추월했지? 과외 아줌마!
그 순간 연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 먼지를 닦고 다시 그 망나니 녀석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금갈색 염색을 지우고 머리를 조금 깎고 키를 한 40cm 정도 자르고 교복을 입히면,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 속에 번개 같이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 아아! 너, 너어!”
- 노화의 첫 번째 단계는 기억력 감퇴라지?
망나니의 수첩에 다시 씌어진 말은 연수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너, 이 꼬마!” 그랬다. 그녀는 분명히 7년 전 이 꼬마를 본 적이 있었다. 씁쓸하게도, 그리고 불쾌하게도. |
|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